
방송은 늘 짧다. 일주일에 한 번, 주어진 시간은 10분. 그런데 여행자는 주어진 그 10분에 경복궁을 유난히 자주 꺼내 들었다. 그렇게 경복궁은 방송에서 일곱 번이나 주인공이 되었는데도, 이야기는 아직 근정전 언저리에서 맴돈다. 광화문에서 입을 열면 걸음보다 말이 먼저 나가고, 말이 많아질수록 궁은 더 넓어진다. 결국 PD가 “역사 이야기를 좀 줄여 달라”고 손짓했고, 여행자는 일단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덜어낸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다른 자리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 자리가 블로그였다. 경복궁에서 시작해 창덕궁·경희궁·창경궁·덕수궁, 그리고 종묘까지. 궁궐과 제례의 공간을 순서대로 걸으며 기록하는 ‘수요궁궐산책’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걸어 둔 프로젝트다. 원고는 이미 대부분 정리해 두었다. 남은 일은 사진을 알맞은 자리에 앉히고, 걸어온 순서대로 올리는 것. 다만 여행자는 시작만큼은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워드프레스를 새로 열며, 첫 글로 이 연재를 꺼내기로 했다. 다섯 궁궐과 종묘만 따라가도 시간이 제법 길어질 것이다. 여기에 행궁까지 얹는다면, 끝이 언제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법궁’의 탄생, 이름으로 세운 질서

조선의 다섯 궁궐은,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라 기록의 그릇에 가깝다. 왕이 머물던 방식, 정치를 펼치던 질서, 왕실 가족의 생활과 의례까지—조선이 남긴 정보가 공간의 층으로 차곡차곡 담겨 있다.
궁궐은 한 왕조의 시작을 맞이한 무대이면서, 그 왕조의 끝을 마주한 자리이기도 하다. 경복궁은 그 사실을 가장 정면으로 보여준다. 왕과 왕족이 살았고, 나라의 일이 결정되었고, 시간은 여기에서 열렸다가 여기에서 닫혔다.
조선이 1392년 새로 문을 열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왕이 머물 ‘첫 집’이 필요해졌다. 경복궁은 그 출발을 맡은 궁궐이다. 한양의 북쪽에 자리해 북궐이라 불렸고, 왕이 공식적으로 머무는 으뜸 궁궐이라는 뜻에서 법궁이라는 이름도 함께 붙었다.
수도를 옮긴다는 일은 행정이 아니라 삶의 이사였다. 왕과 신하만이 아니라 수많은 백성이 따라 움직였다. 그러니 궁궐은 임시로 세울 수 없는 건축이었다. 태조 이성계와 대신들은 후보지를 두고 여러 차례 따져 보았고, 결국 한양의 북쪽—지금의 이 자리로 결론을 내렸다. 광화문은 그 선택의 결과가 오늘까지 남은 가장 큰 상징(象徵)이다.
자리를 정한 다음은 뜻을 정하는 일이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대대손손 복을 누리라는 바람이 들어 있다. 이 궁에서 중요한 전각들의 이름도 같은 흐름으로 정리돼 있다. 우연히 붙은 호칭이 아니라, 나라의 방향과 품격을 언어로 먼저 세우려는 의지에 가깝다.
그 일을 맡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정도전이다. 조선의 틀을 설계하고, 한양의 구상과 경복궁의 질서까지 함께 다듬었던 그는 새 나라의 모습을 한 번에 세우지 않았다. 이름을 정하고, 자리를 정하고, 뜻을 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조심스럽게 하나씩 완성해 갔다.
뜻과 질서가 먼저 세워진 경복궁에는 태평성대를 바라는 소망이 이름과 공간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 바람을 배경으로 조선은 518년의 시간을 이어 갔다. 한글이 세상에 공표된 시대의 숨결도, 방대한 기록이 쌓여 한 왕조의 기억이 된 과정도, 결국 이 궁이 품고 있던 시간의 결을 따라 흘렀다.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를 떠올리게 하는 자리도, 1,800권이 넘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세계기록유산이 작성·정리되던 문화의 토대도 경복궁이라는 무대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의 첫 궁궐인 경복궁은 ‘법궁’이라는 이름처럼 나라의 정신이 모이는 중심이었다. 왕조의 시작과 끝을 함께 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게가 충분한데, 여기에 외세 침략의 흔적과 근대의 격변까지 겹겹이 얹혀 있다. 그래서 경복궁을 걷는 일은 단지 옛 건물을 보는 일이 아니라, 500년 도읍의 중심이 흔들리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을 한 번에 통과하는 일에 가깝다.
북악산을 등진 배치, 절제의 미학과 복합 구조

그 무게는 건물의 크기만이 아니라, ‘앉아 있는 방식’에서도 느껴진다. 경복궁은 자연을 지우지 않고, 자연을 등지고도 자연과 맞추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쪽에는 북악산이 버티고, 궁은 그 산을 등처럼 기대며 중심을 세운다. 지형을 그대로 끌어안고 공간의 질서를 세우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이 궁의 과학은 ‘기술’이라기보다 ‘배치의 태도’로 먼저 드러난다.
정문인 광화문 앞에 넓게 펼쳐진 육조거리는 그 태도가 도시로 확장된 흔적이다. 지금의 세종로로 이어지는 이 길은, 한양이라는 왕도의 도시계획이 어디를 중심으로 움직였는지 또렷하게 보여준다. 낮에는 문과 담이 축을 잡고, 밤에는 빛과 속도가 그 위를 지나간다. 시간이 바뀌어도 중심선이 남는다는 사실이, 이 자리의 힘을 설명한다.

정도전이 처음 완성한 경복궁은 대략 750여 칸 규모로, 후대의 상상처럼 거대한 궁은 아니었다. 이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가까웠다. 그는 궁궐을 크게 짓는 일이 곧바로 백성의 노동과 국가 재정의 압박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의식했고, 그래서 ‘검소한 궁궐’이라는 원칙을 글로 남겼다. 조선경국전에 기록된 궁원(宮苑) 논의는 궁궐을 바라보는 나라의 윤리를 드러낸다.
가끔 자금성과 비교하며 “왜 이렇게 작나”라는 질문이 따라오지만, 그 ‘작음’은 결핍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화려함으로 위압하기보다, 통치의 중심이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을 선택한 것이다. 초기 경복궁의 규모 안에는 애민의 감각이 들어 있다. 크기를 줄인 자리에, 대신 백성을 생각하는 기준이 들어갔다.


궁궐이라고 하면 먼저 화려함을 떠올리기 쉽지만, 왕의 생활시설로 쓰이던 몇몇 전각은 오히려 단순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늬를 덜어낸 문살, 절제된 색, 꼭 필요한 선만 남긴 꾸밈. ‘크게 보이기’보다 ‘흐트러지지 않기’를 택한 흔적이 많다. 그래서 이 공간은 사치의 무대라기보다, 스스로를 다잡는 자리처럼 보인다.
돌로 깎인 수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위엄을 과시하기보다 표정이 조금 해학적이고, 몸짓이 조금 느긋하다. 그 모습은 왕이 늘 백성을 의식했음을 떠올리게 한다. 궁궐은 나라의 최고 권력이 머무는 곳이니 초라할 수는 없지만, 백성을 압도할 만큼 과도하게 화려해서도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조선의 궁궐이 지키려 했던 균형은 분명하다. 왕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한 사치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한 자리였다는 점이다.
궁궐은 한 덩어리 건물이 아니라, 기능이 다른 공간들이 층을 이루며 모인 복합체다. 왕과 관리들이 정사를 논하던 정무 시설이 있고, 왕족이 생활하던 공간이 따로 있으며, 숨을 고르는 후원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겉에서 보면 하나의 담장 안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역할이 다른 길과 마당이 계속 갈라진다.
경복궁은 그 안에 다시 ‘궁 같은 궁’들이 들어앉아 있다는 점에서 더 복잡하다.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그리고 고종이 조성한 건청궁처럼, 한 궁궐 안에 여러 작은 궁들이 겹겹이 모여 있다. 그래서 이곳을 걷다 보면 단순히 전각을 본다는 느낌보다, 권력과 생활과 휴식이 서로 다른 속도로 돌아가던 도시를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훼손과 회복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경복궁은 눈에 띄게 비어 버렸다. 전각 대부분이 철거되고, 근정전처럼 일부 핵심 건물만 남았다. 빈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궁궐을 ‘없앤’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궁을 향한 시선을 가리는 방식까지 동원한 셈이다. 담장 안의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을 바라보는 감각 자체가 훼손됐다.
광화문도 한동안 제자리를 잃었다. 1968년에는 건춘문 옆에 폐허처럼 남아있던 광화문이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앞쪽으로 옮겨 세워졌다. 문은 다시 서 있었지만, 그 문이 지키던 궁의 자리는 여전히 어긋나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사진을 보면 ‘복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늦게 도착했는지 먼저 실감하게 된다.

경복궁의 회복은 선언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0년부터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먼저 시야를 가로막던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다. 그 다음은 끊어진 중심축을 다시 잇는 일이었다.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는 과정은 ‘건물을 하나 세우는 작업’이 아니라, 궁궐이 궁궐답게 보이도록 공간의 질서를 되돌리는 작업에 가까웠다.
복원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처럼 궁궐의 생활과 의례를 떠받치던 영역들이 조금씩 모습을 되찾고 있다. 경복궁을 걷다 보면, 어떤 전각은 이미 완성된 과거처럼 서 있고, 어떤 자리에는 아직 빈칸이 남아있다. 그 빈칸까지 포함해서, 이곳은 지금도 ‘되돌아오는 중’인 궁이다.
경복궁의 중심은 ‘길’로 이해하는 편이 빠르다. 광화문에서 흥례문을 지나 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으로 이어지는 축이 궁궐의 핵심을 관통한다. 이 중심부는 기하학적 질서에 기대어 대칭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왕이 나라의 일을 보고, 결정을 내리고, 생활로 돌아가는 흐름이 하나의 선으로 묶여 있는 셈이다.
하지만 경복궁이 단조로운 대칭만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니다. 중심축을 벗어나면 전각들은 비대칭으로 배치되어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가 다시 전체의 통일감을 만든다. 딱딱한 규칙과 유연한 현실이 한 담장 안에서 공존하는 구조다. 그래서 경복궁을 걷다 보면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는 말이 추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조선의 으뜸 궁궐이 품었던 왕실 문화의 격조와 품위가, 바로 이 질서와 변주의 조합에서 드러난다.
당백전의 그늘

경복궁을 떠올릴 때 흥선대원군의 이름이 자주 따라붙는다. 그는 당대에도, 후대에도 평가가 한쪽으로 모이지 않는 인물이다. 어떤 시선은 개혁과 결단을 말하고, 또 다른 시선은 강압과 후유증을 말한다. 근대사의 격랑을 생각하면, 이처럼 파란이 짙게 남은 인물이 또 있었을까 싶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세우려 한 목적은 분명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일. 문제는 비용이었다.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고, 원납전(願納錢)을 거두는 방식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재건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부담도 커졌고, 결국 그는 막대한 비용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태로 약 10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당백전의 운명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떠올리게 한다. 잠깐의 화려함이 남긴 흔적이 길었던 셈이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운 경복궁은 스케일부터 달랐다. 대략 500여 동의 건물이 미로처럼 촘촘히 들어서고, 전체 규모는 7,200칸에 이르는 웅장한 구성이었다. 담장 안이 ‘정무와 생활의 공간’이라는 수준을 넘어, 작은 도시가 한 번에 들어앉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쯤이면 자금성과 비교해도 결코 작다고만 말하기 어렵다.
다만 크기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 그 규모를 가능하게 만든 동원과 비용,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부담은 결국 나라의 체력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건된 경복궁을 바라보면 한 가지 질문이 따라온다. 이 과도한 웅장함이 조선의 말기에 어떤 짐이 되었는가. 사치로 보이는 순간부터, 역사는 늘 흔들리기 시작한다.
현재진행형 경복궁

고종 때 다시 세워졌던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전각 10여 채만 남긴 채 대부분이 사라졌다. 중건으로 한 번 커졌던 궁은 다시 비워졌고, 그 빈자리는 오랫동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형태로 남았다. 그래서 경복궁의 역사는 찬란함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한 왕조의 중심이었던 공간이 어떻게 훼손되고 지워졌는지까지 함께 품고 있다.
지금 진행 중인 복원 사업은 그 공백을 메우는 일이다. 목표는 2030년까지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의 약 75% 수준을 복원하는 것. 완성된 과거를 그대로 복제한다기보다, 궁궐이 가진 질서와 맥락을 최대한 회복하려는 방향에 가깝다. 경복궁은 북악산을 등지고 흐름을 거스르지 않게 앉아 있는, 자연과 맞물린 ‘과학적인’ 건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500년 왕조의 위엄과 권위가 겹겹이 쌓여 있다. 이곳을 걷는 일은 결국, 사라진 시간을 다시 읽는 일이다.